영화 〈청설〉의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자니 불현듯 90년대 영화 〈비트〉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1997년의 민(정우성)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손을 놓고 위태롭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갈 곳 잃은 그 시절 청춘의 막막함과 방황이 그 폭주하는 오토바이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흘러, 1997년에 태어난 이들이 20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2024년. 〈청설〉의 용준(홍경) 역시 오토바이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지도, 손을 놓지도 않는다. 그의 바이크 뒷자리엔 배달용 도시락 바구니가 얌전히 묶여 있기 때문이다. 취업은 감감무소식이고 딱히 뾰족한 꿈도 없지만, 부모님 가게 일을 도우며 묵묵히 오늘을 살아내는 현실적인 20대의 맨얼굴이다.
지루한 열대야처럼 늘어지던 용준의 일상에 어느 날 여름(노윤서)이 쏟아지는 햇살처럼 뛰어든다. 90년대 〈비트〉의 로미(고소영)가 어딘가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구석이 있었다면, 2024년의 여름은 그저 맑고 투명하다. 무해함 그 자체로 스크린을 비집고 나오는 느낌이랄까. 첫눈에 반한다는 뻔한 클리셰가 관객에게 납득되려면 결국 배우가 뿜어내는 본연의 아우라가 필요하다. 슬로 모션을 걸거나 웅장한 음악을 까는 식의 작위적인 장치 없이도, 질끈 묶은 머리에 면티 쪼가리를 입고 알바를 뛰러 가는 뒷모습만으로 노윤서는 그걸 가뿐히 해낸다. 업계 관계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 시대 새로운 청춘의 얼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마주한 배우 노윤서의 20대 역시 영화 속 여름과 묘하게 겹쳐 있었다. 2022년 〈우리들의 블루스〉로 데뷔해 단숨에 스크린 주연까지 꿰찬 그는 이 모든 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눙쳤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고민이 배어 있었다. 학창 시절의 캐스팅 제안들을 고사하다가 대학 졸업 무렵에야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진지하게 마주했다는 그의 말씨엔 제법 단단한 심지가 엿보였다. 대선배 전도연과 호흡을 맞췄던 〈일타 스캔들〉 현장을 회상할 때 그의 눈은 유독 반짝였다. 상대방이 ‘진짜’ 감정을 던져주니 내 안에서도 자연스레 ‘진짜’가 튀어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며, 자신도 그런 날것의 진심을 건네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 대사 대신 수어로 소통해야 했던 경험은 그에게 또 다른 연기의 질감을 안겨주었다. 캐스팅된 배우들이 죄다 내향형이라 촬영 석 달 전부터 시작된 수어 수업을 핑계 삼아 겨우 친해졌다고 웃어 보이던 그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수어가 가진 힘을 짚어냈다. 소리 내는 말은 딴청을 피우며 내뱉어도 닿을 수 있지만, 수어는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봐야만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 표정이 70%를 차지하는 그 침묵의 언어를 통해, 말없이도 짙은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고 한다.
이처럼 영화가 담아내는 청춘의 결이 시대에 따라 섬세하게 변모하듯, 우리가 영화를 향유하는 방식과 공간의 감각 역시 새로운 흐름을 맞이하고 있다. 닫힌 암실을 벗어나 탁 트인 공간에서 이토록 맑은 청춘들의 서사를 마주한다면 어떨까. 마침 서울의 영화 관람 문화에 제법 낭만적인 선택지가 하나 추가됐다. 지난 11월 개관 이후 하루 평균 600명 이상이 찾으며 예매율 86%를 찍고 있는 서울영화센터가 그 무대다. 단순히 영화를 트는 곳을 넘어 하나의 공공 영상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은 이곳이, 오는 5월 15일부터 옥상을 활용한 ‘스카이 시네마(Sky Cinema)’를 정식으로 연다.
매주 금요일 밤 8시, 남산타워가 걸린 서울의 야경을 병풍 삼아 영화가 스크린에 걸린다. 청춘물과 음악 영화부터 평소 접하기 힘든 독립·예술 영화들까지 라인업도 꽤나 구미를 당긴다. 감독이나 배우들이 직접 찾아와 관객과 수다를 떠는 GV(관객과의 대화)도 쏠쏠한 재미를 더할 예정이다. 상영 프로그램 외에도 스마트폰으로 영화 찍기, 충무로 영상 제작 투어, 청소년 영화 캠프 같은 옹골찬 체험 프로그램들이 공간을 한층 풍성하게 채운다. 6월 1일부터는 유료(성인 7,000원, 학생 6,000원)로 전환된다고 하니,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스크린에 비친 청춘들의 치열하고도 무해한 이야기를 만끽하고 싶다면 이번 주말쯤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좋겠다.